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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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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5,7885
== 역사 == 1832년 12월 7일에 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간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할 기초적인 증거를 모았다. [* 도중 다윈은 안데스 답사를 떠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산에 있는 바위들이 모두 바다의 퇴적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잦은 것으로 보아 안데스 지역은 최근에 탄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후 그는 비밀리에 진화론 연구를 계속했다. 1844년 자연선택에 관한 주장을 글로 쓰는 작업이 끝나자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해 했다. 그는 조셉 후커(Joseph D. Hooker)가 자신이 비글호 항해 중 수집한 식물을 조사하기도 했고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고 판단해 편지를 썼다. 후커는 다윈이 바란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론을 출판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로버트 체임버스(Robert Chambers)가 1844년 10월에 익명으로 출판한 <창조의 과정(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격렬하게 비난하자, 다윈은 자신의 책을 출판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대신 1859년 11월 초판이 나오기 전까지 진화에 관한 증거를 많이 찾아냈고, 방대한 길이의 책이 만들어졌다.[* 그 기간에 그는 따개비에 관한 1천 쪽에 달하는 책을 썼고 자연사학자로서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원고도 너무 분량이 많아서 출판 가능한 분량으로 요약하려 했으나, 결국 요약본조차도 책 한권 크기로 늘어났다. 그는 예상되는 공격을 맞받아칠 논점과 증거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윈은 <연구 저널>(Journal of Researches)지의 발행인인 존 머레이에게 연락하여 저널과 함께 한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이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었다. 종의 기원은 매우 방어적인 책인데, 왜냐하면 다윈은 다른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비난하는 것을 오랜 기간 동안 조용히 듣고 있었고 이에 대해 반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많은 평론가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해부학자인 리처드 오언은 다윈의 책을 "과학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1860년, 옥스퍼드에서 새뮤얼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와 토머스 헉슬리와의 세기의 대결이 일어났다. 윌버포스는 모든 피조물은 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다면서 다윈의 책은 허황된 가설에 입각해 있고 증거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헉슬리를 바라보며 그의 조상 중 원숭이는 할아버니 쪽인지, 할머니 쪽인지 물었다. 헉슬리는 "만일 미천한 원숭이를 조상으로 택하겠는가, 아니면 탁월한 능력과 영향력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으면서도 그러한 힘을 진지한 과학적 토론의 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얘기를 하는 데 쓰는 인간을 조상으로 택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추호도 주저함이 없이 원숭이를 택하겠습니다."[* 칼 짐머, 이창의 옮김, <진화>, 95p]라고 맞받아쳤다.[* 그 도중에 청중석에서 논쟁을 듣고 있던 피츠로이 선장(과거 비글호 선장)이 일어서서 성서를 움켜쥔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인간이 아니라 신을 믿으라고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1870년대 이후 영국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멘델은 완두콩 연구로 유전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나, 실제로 유전학이 시작된 시기는 그가 죽은 지 16년 후였다. 1920년대에 과학자들은 돌연변이가 진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드브리스(Hugo De Vries)는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생물에 갑자기 새로운 형질이 생겨나는 것을 돌연변이라 명명했고,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의 조합으로 진화적 설명의 통일성에 도움을 주었다. 로널드 피셔와 시월 라이트 등은 자연선택과 유전학을 결합해 진화론의 기반을 더욱 다졌다. 이후 동물학, 식물학, 생태학, 집단유전학, 고생물학 등의 여러 학문들이 수렴되어 현대 종합론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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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1832년 12월 7일에 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간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할 기초적인 증거를 모았다. [* 도중 다윈은 안데스 답사를 떠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산에 있는 바위들이 모두 바다의 퇴적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잦은 것으로 보아 안데스 지역은 최근에 탄생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후 그는 비밀리에 진화론 연구를 계속했다. 1844년 자연선택에 관한 주장을 글로 쓰는 작업이 끝나자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해 했다. 그는 조셉 후커(Joseph D. Hooker)가 자신이 비글호 항해 중 수집한 식물을 조사하기도 했고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이라고 판단해 편지를 썼다. 후커는 다윈이 바란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론을 출판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로버트 체임버스(Robert Chambers)가 1844년 10월에 익명으로 출판한 <창조의 과정(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격렬하게 비난하자, 다윈은 자신의 책을 출판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대신 1859년 11월 초판이 나오기 전까지 진화에 관한 증거를 많이 찾아냈고, 방대한 길이의 책이 만들어졌다.[* 그 기간에 그는 따개비에 관한 1천 쪽에 달하는 책을 썼고 자연사학자로서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원고도 너무 분량이 많아서 출판 가능한 분량으로 요약하려 했으나, 결국 요약본조차도 책 한권 크기로 늘어났다. 그는 예상되는 공격을 맞받아칠 논점과 증거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윈은 <연구 저널>(Journal of Researches)지의 발행인인 존 머레이에게 연락하여 저널과 함께 한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이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었다. 종의 기원은 매우 방어적인 책인데, 왜냐하면 다윈은 다른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비난하는 것을 오랜 기간 동안 조용히 듣고 있었고 이에 대해 반박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많은 평론가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해부학자인 리처드 오언은 다윈의 책을 "과학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1860년, 옥스퍼드에서 새뮤얼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와 토머스 헉슬리와의 세기의 대결이 일어났다. 윌버포스는 모든 피조물은 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다면서 다윈의 책은 허황된 가설에 입각해 있고 증거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헉슬리를 바라보며 그의 조상 중 원숭이는 할아버니 쪽인지, 할머니 쪽인지 물었다. 헉슬리는 "만일 미천한 원숭이를 조상으로 택하겠는가, 아니면 탁월한 능력과 영향력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으면서도 그러한 힘을 진지한 과학적 토론의 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얘기를 하는 데 쓰는 인간을 조상으로 택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추호도 주저함이 없이 원숭이를 택하겠습니다."[* 칼 짐머, 이창의 옮김, <진화>, 95p]라고 맞받아쳤다.[* 그 도중에 청중석에서 논쟁을 듣고 있던 피츠로이 선장(과거 비글호 선장)이 일어서서 성서를 움켜쥔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인간이 아니라 신을 믿으라고 호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1870년대 이후 영국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멘델은 완두콩 연구로 유전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으나, 실제로 유전학이 시작된 시기는 그가 죽은 지 16년 후였다. 1920년대에 과학자들은 돌연변이가 진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드브리스(Hugo De Vries)는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생물에 갑자기 새로운 형질이 생겨나는 것을 돌연변이라 명명했고,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의 조합으로 진화적 설명의 통일성에 도움을 주었다. 로널드 피셔와 시월 라이트 등은 자연선택과 유전학을 결합해 진화론의 기반을 더욱 다졌다. 이후 동물학, 식물학, 생태학, 집단유전학, 고생물학 등의 여러 학문들이 수렴되어 현대 종합론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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