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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하라 히로코 | |
원어 | 笠原弘子 |
영문 | Kasahara Hiroko |
직업 | 가수, 성우, 연극배우 |
소속 | 오기 프로 THE NEXT |
생일 | 1970년 2월 19일 |
출생 | 니가타현 |
혈액형 | A형 |
신장 | 155cm |
취미 | 요요 |
데뷔 | 은하표류 바이팜 |
활동 | 게임, 애니메이션, 라디오, 연극, 가수 |
그룹 | 온고지신 |
카사하라 히로코는 일본의 성우, 가수 겸 연극배우로, 원래는 5살에 아역배우로 데뷔했으나, 공식 프로필에는 중학생 시절 애니메이션 성우로 데뷔한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개최된 30주년 공연 등을 보면 공식적으로 5살 데뷔를 공인하고 있다. 현재는 오기 프로 THE NEXT에 소속되어있으며, 가족은 본인과 부모님 세명 가족. 아직 미혼 상태이다.
일본요요협회 홍보대사. 직함만이 아니라 요요 검증시험 통과한 능숙한 요요 능력자다.
목차
1. 특징
1.1. 가수로서
2. 연혁
2.1. 성우 및 기타
2.2. 가수
2.2.1. 걸즈 팝 시대: 1988~1994년
2.2.2. 포크&프로그래시브 음악 시대: 1993~1999년
2.2.3. 벨라복스 레코드 시대: 2000~2003년
2.2.4. Y.M.O 시대: 2003년~
3. 참여 작품
3.1. TV 애니
3.2. OVA
3.3. 극장판
3.4. 게임
1. 특징
1.1. 가수로서
2. 연혁
2.1. 성우 및 기타
2.2. 가수
2.2.1. 걸즈 팝 시대: 1988~1994년
2.2.2. 포크&프로그래시브 음악 시대: 1993~1999년
2.2.3. 벨라복스 레코드 시대: 2000~2003년
2.2.4. Y.M.O 시대: 2003년~
3. 참여 작품
3.1. TV 애니
3.2. OVA
3.3. 극장판
3.4. 게임
1. 특징 ✎ ⊖
워낙 어릴적부터 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40대의 나이에 이미 경력 30년을 넘어선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성우 및 연기자로서보다는 노래로서 더 유명하며, 이러한 특성은 업계에서도 유명하여 ‘성우계의 가희(歌姫)‘라고 불리울 정도로 성우와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병행하는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극단 코마도리 시절부터의 선배인 토미나가 미나와의 친분이 두터워 콘서트 프로듀스를 도와준다거나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극단 코마도리 출신의 후배인 후지에다 나리코와 사카모토 마아야와도 사이가 좋으며, 세 사람을 셋트로 ‘성우계의 코마도리 자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7년 궁극초인 아-루 이후 야마모토 마사유키와 친해져 야마모토 마사유키가 카사하라 히로코의 퍼스트 앨범에 곡을 주거나, 야마모토 마사유키의 앨범에 여성 보컬리스트로 참가하거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보인 적도 있다.
일단 본업은 성우인데, 목소리 연기 면에서 차분하고 어른스런 여성역에 있어서는 상당히 평가도 높고, 업계에서도 그런 역에 맞춰서 카사하라 히로코를 직접 지명해 역을 맡기는 경우도 있다고. 대표적으로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호오우지 후우 역. 그러나 그런류의 연기 외의 연기는 별로 맡은 바도 없고 본인도 그 외의 연기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 듯. 게다가 목소리 연기를 들어보면 목소리가 상당히 독특해서 작품에 따라서는 혼자만 목소리가 붕 뜬것처럼 들릴 때도 있다.(대표적으로 아미테이지 더 서드) 특별히 다른 음역을 낼 수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본인도 특정분야 이외의 연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안정적인 본인 스타일 연기에 전념하는 편. 일정시기 이후에는 사실상 가수가 본업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성격은 평소에 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같이 다녀보면 훨씬 멍한 성격이라고(…) 전해진다.
토미나가 미나가 프로듀스한 ‘사천삼백팔십엔 하늘에서 돈이 쏟아진날’ 연극공연에 객원 출연했는데, 극중에 꽁트로 분홍색의 전신 타이즈를 입고 나오는 씬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전해들은 카사하라 히로코는 ‘스커트 붙여주세요’라고 했다고. 그리고 그 괴스런 전신타이즈 차림으로 무대에 서서 공연을 했고, 그 무대를 본 사카모토 마아야는 ‘카사하라 선배 대단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비행기를 싫어해서 일본내 이동시에도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열차를 주로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아미테이지 더 서드관련으로 이벤트 참가 요청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 후쿠오카의 예정된 이벤트 일정에 맞추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탑승했다고 한다. 이 때 비행기가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후에도 비행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급할때는 이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듯.
‘도쿄 Q채널’에서 만난 스도 마유미와는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절친한 친구라고. 때문에 카사하라 히로코의 앨범에는 와리타 야스히코(割田康彦)가 작곡하고, 스도 마유미가 작사한 곡이 상당수 수록되어있다.
2005년 데뷔 30주년 공연 이후에는 앨범 활동이나 성우 활동을 전면에 내세워 하는 경우가 극히 줄었고, 소극장 공연들을 하고있다. 현재는 성우로서는 거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재즈 뮤지션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극단 코마도리 시절부터의 선배인 토미나가 미나와의 친분이 두터워 콘서트 프로듀스를 도와준다거나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극단 코마도리 출신의 후배인 후지에다 나리코와 사카모토 마아야와도 사이가 좋으며, 세 사람을 셋트로 ‘성우계의 코마도리 자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1987년 궁극초인 아-루 이후 야마모토 마사유키와 친해져 야마모토 마사유키가 카사하라 히로코의 퍼스트 앨범에 곡을 주거나, 야마모토 마사유키의 앨범에 여성 보컬리스트로 참가하거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등의 활동을 보인 적도 있다.
일단 본업은 성우인데, 목소리 연기 면에서 차분하고 어른스런 여성역에 있어서는 상당히 평가도 높고, 업계에서도 그런 역에 맞춰서 카사하라 히로코를 직접 지명해 역을 맡기는 경우도 있다고. 대표적으로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호오우지 후우 역. 그러나 그런류의 연기 외의 연기는 별로 맡은 바도 없고 본인도 그 외의 연기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 듯. 게다가 목소리 연기를 들어보면 목소리가 상당히 독특해서 작품에 따라서는 혼자만 목소리가 붕 뜬것처럼 들릴 때도 있다.(대표적으로 아미테이지 더 서드) 특별히 다른 음역을 낼 수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본인도 특정분야 이외의 연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안정적인 본인 스타일 연기에 전념하는 편. 일정시기 이후에는 사실상 가수가 본업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성격은 평소에 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같이 다녀보면 훨씬 멍한 성격이라고(…) 전해진다.
토미나가 미나가 프로듀스한 ‘사천삼백팔십엔 하늘에서 돈이 쏟아진날’ 연극공연에 객원 출연했는데, 극중에 꽁트로 분홍색의 전신 타이즈를 입고 나오는 씬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전해들은 카사하라 히로코는 ‘스커트 붙여주세요’라고 했다고. 그리고 그 괴스런 전신타이즈 차림으로 무대에 서서 공연을 했고, 그 무대를 본 사카모토 마아야는 ‘카사하라 선배 대단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비행기를 싫어해서 일본내 이동시에도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열차를 주로 이용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아미테이지 더 서드관련으로 이벤트 참가 요청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 후쿠오카의 예정된 이벤트 일정에 맞추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탑승했다고 한다. 이 때 비행기가 생각보다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 이후에도 비행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급할때는 이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듯.
‘도쿄 Q채널’에서 만난 스도 마유미와는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 절친한 친구라고. 때문에 카사하라 히로코의 앨범에는 와리타 야스히코(割田康彦)가 작곡하고, 스도 마유미가 작사한 곡이 상당수 수록되어있다.
2005년 데뷔 30주년 공연 이후에는 앨범 활동이나 성우 활동을 전면에 내세워 하는 경우가 극히 줄었고, 소극장 공연들을 하고있다. 현재는 성우로서는 거의 활동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재즈 뮤지션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1.1. 가수로서 ✎ ⊖
가수로서의 카사하라 히로코는 음악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카사하라 히로코가 부른 애니메이션 노래는 대략 300곡이 조금 넘는데, 거의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이다. 아마도 애니메이션 송을 가장 많이 부른 가수 중 한 명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많은 곡을 불렀고, 그 대부분이 애니메이션 팬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곡들이라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명의로 36장의 싱글, 26장의 정규앨범, 3장의 미니 앨범, 5장의 베스트 앨범, 6장의 라이브 앨범, 3장의 컨셉 앨범을 발표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음악으로서 나온 싱글도 합치면 그 배 이상이 되겠지만 개인 명의로 낸 것만으로도 저 정도다. 그리고 12장의 라이브 LD, 2장의 라이브 DVD, 2장의 영상 앨범까지 합치면 카사하라 히로코 명의로 나온 음반은 90여장에 이른다.
실질적인 가수 활동이 1988년부터 2004년까지 16년 동안이었는데, 16년 동안에 이 정도 분량이 나왔다는 건 그 만큼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반이 팔려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40여 회의 콘서트를 열었었다는 것, 심지어는 워너저팬 30주년 기념 음반이 ‘카사하라 히로코 슈퍼 베스트’였을 만큼 그녀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카사하라 히로코는 2000년 워너 재팬을 떠나던 시점에 워너 재팬에서만 800만장의 CD를 팔았다고 한다. 타 음반사에서 나온 음반이 워낙 많아서 누적 1000만장 이상을 판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기 가수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사주는 팬이 있었고, 그 양이 결코 적지 않았던 셈이다. 2007년에는 과거 워너저팬에서 발매되었던 앨범들이 디지털 리마스터링판으로 재발매 될 정도로 가수 카사하라 히로코는 여전히 먹히는 아이템이다.
자기 명의로 36장의 싱글, 26장의 정규앨범, 3장의 미니 앨범, 5장의 베스트 앨범, 6장의 라이브 앨범, 3장의 컨셉 앨범을 발표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음악으로서 나온 싱글도 합치면 그 배 이상이 되겠지만 개인 명의로 낸 것만으로도 저 정도다. 그리고 12장의 라이브 LD, 2장의 라이브 DVD, 2장의 영상 앨범까지 합치면 카사하라 히로코 명의로 나온 음반은 90여장에 이른다.
실질적인 가수 활동이 1988년부터 2004년까지 16년 동안이었는데, 16년 동안에 이 정도 분량이 나왔다는 건 그 만큼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반이 팔려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40여 회의 콘서트를 열었었다는 것, 심지어는 워너저팬 30주년 기념 음반이 ‘카사하라 히로코 슈퍼 베스트’였을 만큼 그녀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카사하라 히로코는 2000년 워너 재팬을 떠나던 시점에 워너 재팬에서만 800만장의 CD를 팔았다고 한다. 타 음반사에서 나온 음반이 워낙 많아서 누적 1000만장 이상을 판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기 가수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사주는 팬이 있었고, 그 양이 결코 적지 않았던 셈이다. 2007년에는 과거 워너저팬에서 발매되었던 앨범들이 디지털 리마스터링판으로 재발매 될 정도로 가수 카사하라 히로코는 여전히 먹히는 아이템이다.
2. 연혁 ✎ ⊖
2.1. 성우 및 기타 ✎ ⊖
카사하라 히로코는 1970년 2월 19일 어머니의 본가인 니이가타 현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에는 도쿄에서 성장했다. 5살이 되던해에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 소심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 어머니의 권유로 극단 코마도리에 입단시험을 응시, 합격하여 입단하게 된다. 1975년, 5살의 나이로 NHK의 어린이 교육방송 ‘우리 모두 친구(みんななかよし)‘에 출연, 2년간 여동생 역과 학생 역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81까지 지속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경력을 쌓아나간다.
중학생이 되면서 극단 코마도리의 방침상 학업을 빼먹으며 활동할 수 없었고, 그런 탓에 정규적인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학교에서 활동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방송출연이 어려워지자 활동 분야를 성우 쪽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유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학교에 들킬 일이 없다’라는 것. 중2가 되던시기에 성우로서 애니메이션 은하표류 바이팜의 외계인소녀 ‘카츄아’ 역으로 첫 데뷔를 하게 된다. 또한 동시기에 영화 더빙 출연, CM송, 애니메이션 주제가 부르기 등 다양한 오디션에 참가해 경험을 쌓아간다.
이후 각종 애니메이션 성우로서 활동하며 고교에 진학, 연극 ‘피터팬’에 웬디의 여동생 ‘웬디’역으로 출연하여 연극배우로서 첫 데뷔를 했다. 이듬해인 고2 때는 ‘샴페인 샤워’라는 축구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처음으로 담당하게 된다. 또한 고교 졸업 직전인 1988년,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이미지 싱글앨범인 ‘Believe yourself Again / 하드보일드가 뭐야?'를 발매하고, 같은해에 본인명의의 앨범인 ‘슬로우 글래스의 빛’을 발매하게 된다. 이 때 카사하라 히로코는 노래하는 즐거움을 깨닫고 노래에 많은 연습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두번째 개인명의 앨범인 ‘Cafe Paradise’를 발매하기에 이르른다.
스무살이 되던 1990년에는 리메이크곡 이방인’90을 앨범으로 발매, 가수 활동에 박차를 기하며, 동시에 애니 성우로서도 첫 주연 캐릭터인 뾰로롱 꼬마마녀에 주인공 ‘민트’ 역을 담당하게 된다. 본인은 어릴적부터 동경하던 마법소녀물의 주인공이 되어서 두근거렸던 한편으로 기술명을 자연스럽게 외는게 상당히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같은해 카사하라 히로코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오프닝송 コンディション・グリーン 〜緊急発進〜을 부르게 된다. 애니메이션의 흥행과 더불어서 카사하라 히로코의 인지도도 급상승하게 된다. 동 시기에 TV 방송을위해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공주 역을 담당해서 녹음 했다. 특히 이 녹음 후 몇 달 후 오드리 햅번이 사망해 더더욱 인상에 깊이 남았다고.
1992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2에 마르두크의 무녀 ‘이슈탈’역을 담당하면서 작중의 삽입곡까지 직접 불렀으나, 아쉽게도 애니메이션의 실패로 인해서 큰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1993년에는 무책임함장 테일러에 출연, 이듬해인 1994년에는 DNA와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주연캐릭터 중 하나를 담당하며 잇달아 흥행작의 주연을 연기한다. 특히 마법기사 레이어스에서는 조용하지만 강한 마음을 가진 호오우지 후우역을 맡아 여성팬이 많이 늘어 기뻤다고 회고했다. 또한 후우의 캐릭터 이미지송인 そよ風のソナチネ로 처음으로 오리콘 100위권 내에 입성한다.
1995년에는 로미오의 푸른하늘 오프닝, 엔딩곡을 불렀으며, 일본 OVA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SF물 아미테이지 더 서드의 주인공 아미테이지 역을 담당해 연기했으며, 오프닝 엔딩곡도 직접 불렀다. 작품의 높은 평가와 함께 많은 지명도를 얻었다. 이 때 해외에서 아미테이지 더 서드 관련으로 페스티벌 참가를 요청했으나 비행기를 타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일은 업계에 들어와서 나중에 가장 후회했던 일 중 하나라고.
이 시기에는 매체가 CD로 전환된 게임기의 게임들에도 음성과 노래가 수록되기 시작하면서 카사하라 히로코도 게임쪽 진출이 급속도로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에메랄드 드래곤의 탐린이나 탄생의 후지무라 사오리 등을 시작으로 게임 성우로서도 활발히 활동을 시작하고 쿼바디스2 등의 작품에서는 보컬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한다.
1997년은 흡혈희 미유 TV판 리메이크나 소년탐정 김전일 등에 참여하지만 애니메이션 쪽에서는 되려 주역을 맡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고, 되려 게임 쪽에서 활약이 더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부터 음악활동이 점차 더 활성화 되면서 성우보다는 가수로서의 길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1998년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의 사회를 맡게되면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으며, 데뷔작 은하표류 바이팜의 리메이크작인 은하표류 바이팜13을 재녹음 했다.
2000년에는 라디오 방송 ‘한그릇더 자유(おかわり自由)‘를 시작하며 성우로서보다는 가수로서의 면모를 더 보여주게 된다. 소심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그녀 스스로도 방송을 하면서 쾌활한 성격이 되었다고 자평할 정도로 방송은 즐거웠다고.
2003년에는 5살부터 소속되어 활동해온 소속사 극단 코마도리를 떠나 새로운 소속사 Love Live(현 오기 프로 THE NEXT)로 옮기게 된다. 이 즈음에는 스스로 곡과 가사를 직접 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의 길에 크게 진전을 보였다고 자평.
2004년에는 5년가까이 계속된 ‘한그릇더 자유’ 방송이 종방되었고, 앨범작업을 하면서 오카자키 리츠코와 만나서 음악적으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TV애니메이션 Wind-a breath of heart의 주제곡을 부르면서 텐몬에게도 새로운 음악적 방향성을 배울수 있었다고. 이 즈음부터 앨범활동보다 공연활동을 중심으로하는 재즈뮤지션으로서의 방향성을 확립해 나가게 된다.
2005년 데뷔 30주년 공연을 마치고나서는 새로운 앨범을 내기보다는 가수로서의 소공연 중심의 활동과 소소한 성우로서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중학생이 되면서 극단 코마도리의 방침상 학업을 빼먹으며 활동할 수 없었고, 그런 탓에 정규적인 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학교에서 활동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방송출연이 어려워지자 활동 분야를 성우 쪽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유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으니까 학교에 들킬 일이 없다’라는 것. 중2가 되던시기에 성우로서 애니메이션 은하표류 바이팜의 외계인소녀 ‘카츄아’ 역으로 첫 데뷔를 하게 된다. 또한 동시기에 영화 더빙 출연, CM송, 애니메이션 주제가 부르기 등 다양한 오디션에 참가해 경험을 쌓아간다.
이후 각종 애니메이션 성우로서 활동하며 고교에 진학, 연극 ‘피터팬’에 웬디의 여동생 ‘웬디’역으로 출연하여 연극배우로서 첫 데뷔를 했다. 이듬해인 고2 때는 ‘샴페인 샤워’라는 축구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처음으로 담당하게 된다. 또한 고교 졸업 직전인 1988년,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이미지 싱글앨범인 ‘Believe yourself Again / 하드보일드가 뭐야?'를 발매하고, 같은해에 본인명의의 앨범인 ‘슬로우 글래스의 빛’을 발매하게 된다. 이 때 카사하라 히로코는 노래하는 즐거움을 깨닫고 노래에 많은 연습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두번째 개인명의 앨범인 ‘Cafe Paradise’를 발매하기에 이르른다.
스무살이 되던 1990년에는 리메이크곡 이방인’90을 앨범으로 발매, 가수 활동에 박차를 기하며, 동시에 애니 성우로서도 첫 주연 캐릭터인 뾰로롱 꼬마마녀에 주인공 ‘민트’ 역을 담당하게 된다. 본인은 어릴적부터 동경하던 마법소녀물의 주인공이 되어서 두근거렸던 한편으로 기술명을 자연스럽게 외는게 상당히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같은해 카사하라 히로코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오프닝송 コンディション・グリーン 〜緊急発進〜을 부르게 된다. 애니메이션의 흥행과 더불어서 카사하라 히로코의 인지도도 급상승하게 된다. 동 시기에 TV 방송을위해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공주 역을 담당해서 녹음 했다. 특히 이 녹음 후 몇 달 후 오드리 햅번이 사망해 더더욱 인상에 깊이 남았다고.
1992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2에 마르두크의 무녀 ‘이슈탈’역을 담당하면서 작중의 삽입곡까지 직접 불렀으나, 아쉽게도 애니메이션의 실패로 인해서 큰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1993년에는 무책임함장 테일러에 출연, 이듬해인 1994년에는 DNA와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주연캐릭터 중 하나를 담당하며 잇달아 흥행작의 주연을 연기한다. 특히 마법기사 레이어스에서는 조용하지만 강한 마음을 가진 호오우지 후우역을 맡아 여성팬이 많이 늘어 기뻤다고 회고했다. 또한 후우의 캐릭터 이미지송인 そよ風のソナチネ로 처음으로 오리콘 100위권 내에 입성한다.
1995년에는 로미오의 푸른하늘 오프닝, 엔딩곡을 불렀으며, 일본 OVA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SF물 아미테이지 더 서드의 주인공 아미테이지 역을 담당해 연기했으며, 오프닝 엔딩곡도 직접 불렀다. 작품의 높은 평가와 함께 많은 지명도를 얻었다. 이 때 해외에서 아미테이지 더 서드 관련으로 페스티벌 참가를 요청했으나 비행기를 타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일은 업계에 들어와서 나중에 가장 후회했던 일 중 하나라고.
이 시기에는 매체가 CD로 전환된 게임기의 게임들에도 음성과 노래가 수록되기 시작하면서 카사하라 히로코도 게임쪽 진출이 급속도로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에메랄드 드래곤의 탐린이나 탄생의 후지무라 사오리 등을 시작으로 게임 성우로서도 활발히 활동을 시작하고 쿼바디스2 등의 작품에서는 보컬리스트로 참여하기도 한다.
1997년은 흡혈희 미유 TV판 리메이크나 소년탐정 김전일 등에 참여하지만 애니메이션 쪽에서는 되려 주역을 맡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고, 되려 게임 쪽에서 활약이 더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부터 음악활동이 점차 더 활성화 되면서 성우보다는 가수로서의 길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1998년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의 사회를 맡게되면서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으며, 데뷔작 은하표류 바이팜의 리메이크작인 은하표류 바이팜13을 재녹음 했다.
2000년에는 라디오 방송 ‘한그릇더 자유(おかわり自由)‘를 시작하며 성우로서보다는 가수로서의 면모를 더 보여주게 된다. 소심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그녀 스스로도 방송을 하면서 쾌활한 성격이 되었다고 자평할 정도로 방송은 즐거웠다고.
2003년에는 5살부터 소속되어 활동해온 소속사 극단 코마도리를 떠나 새로운 소속사 Love Live(현 오기 프로 THE NEXT)로 옮기게 된다. 이 즈음에는 스스로 곡과 가사를 직접 쓰는 일이 많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의 길에 크게 진전을 보였다고 자평.
2004년에는 5년가까이 계속된 ‘한그릇더 자유’ 방송이 종방되었고, 앨범작업을 하면서 오카자키 리츠코와 만나서 음악적으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TV애니메이션 Wind-a breath of heart의 주제곡을 부르면서 텐몬에게도 새로운 음악적 방향성을 배울수 있었다고. 이 즈음부터 앨범활동보다 공연활동을 중심으로하는 재즈뮤지션으로서의 방향성을 확립해 나가게 된다.
2005년 데뷔 30주년 공연을 마치고나서는 새로운 앨범을 내기보다는 가수로서의 소공연 중심의 활동과 소소한 성우로서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2.2. 가수 ✎ ⊖
카사하라 히로코는 상당히 많은 뮤직션들과 작업을 했는데 초기에는 야마모토 마사유키, 다나카 코헤이, 후지와라 이쿠로, 이와사키 모토요시 등과 작업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마츠미야 쿄코와 콤비를 이루면서 확실한 자기 색채를 갖게 된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악은 크게 4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흔히 ‘걸즈 팝’으로 분류할 수 있는 아이돌 음악 중심의 곡을 발표하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 그리고 마츠미야 쿄코와 함께 작업했던 1993~1999년까지의 시기, 그리고 인디 음악 색채가 강했던 2000~2004년의 벨라복스 레코드 시절, 마지막으로 소속 기획사를 옮긴 뒤로 이벤트 음악 같은 곡들을 주로 부르게 된 시기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앞의 두 시기는 상당히 수준 높은 음반을 많이 발표했던 시기고, 마츠미야 쿄코와 결별한 이후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할 때도 나름대로 괜찮은 음반들을 발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다지 좋은 곡을 발표하지 못하고 음악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그녀의 음반들은 카사하라 히로코라는 캐릭터에 음악을 끼워서 파는 낚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기에 팬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좀 더 자세히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흔히 ‘걸즈 팝’으로 분류할 수 있는 아이돌 음악 중심의 곡을 발표하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 그리고 마츠미야 쿄코와 함께 작업했던 1993~1999년까지의 시기, 그리고 인디 음악 색채가 강했던 2000~2004년의 벨라복스 레코드 시절, 마지막으로 소속 기획사를 옮긴 뒤로 이벤트 음악 같은 곡들을 주로 부르게 된 시기다.
음악적으로 봤을 때 앞의 두 시기는 상당히 수준 높은 음반을 많이 발표했던 시기고, 마츠미야 쿄코와 결별한 이후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할 때도 나름대로 괜찮은 음반들을 발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다지 좋은 곡을 발표하지 못하고 음악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의 그녀의 음반들은 카사하라 히로코라는 캐릭터에 음악을 끼워서 파는 낚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기에 팬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좀 더 자세히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2.2.1. 걸즈 팝 시대: 1988~1994년 ✎ ⊖
야마모토 마사유키, 다나카 코헤이, 후지와라 이쿠로, 이와사키 모토요시 등의 곡을 중심으로 아이돌 풍의 걸즈 팝송을 주로 부르던 시기이다. 워낙에 청아하고 개성적인 톤의 목소리를 갖고 있었기에 많은 작곡가들이 그녀와 함께 작업을 하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물론 애니메이션 성우 활동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주로 애니메이션 음악 계열의 아티스트들이나 오타쿠 성향이 강한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이 많았지만 이 시절의 곡들은 완성도는 상당히 높다.
이 시기의 음악은 전형적인 아이돌 음악이었는데,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를 강조하는 곡들이 중심이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아직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악은 이거다’라는 자기 색체가 아직은 불분명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프로듀스 하는 아티스트에 따라서 앨범의 색채가 확연히 갈리던 시기였고, 애니메이션 주제가 베스트 음반 등이 너무 자주 발매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최고의 명반으로 꼽는 것이 1992년에 나온 ‘머나먼 여름의 휴일(遠い夏の休日)‘와 1994년에 나온 ‘안녕이 가져다 준 것은(さよならがくれたのは)‘이다.
‘머나먼 여름의 휴일’은 애니메이션 성우 음악의 대가였던 작곡가 이와사키 모토요시가 프로듀스했던 앨범이다. 그는 이 앨범 이외에도 크리스마스 캐롤송 앨범이었던 ‘캐롤링’도 프로듀스했다.
이 앨범은 단연 이 시기 히로코 앨범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할만한데, 앨범 작업에 혼다 마사토(T스퀘어의 초기 섹소폰 연주자) 같은 사람이 참여했을 정도다. 곡, 보컬, 연주 등이 모두 훌륭한 앨범으로 평가할만한데, 특히 1번곡인 ‘하얀 페이지 속에(白いページの中に)‘와 2번곡인 ‘바닷바람에 T셔츠(潮風にTシャツ)‘와 7번 곡인 ‘Wind-바람속에(風の中に)~‘는 이 앨범에서도 꼽을만한 명곡들이다. 2, 7번 곡은 혼다 마사토의 섹소폰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 시절 또 하나의 명반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안녕이 가져다 준 것은’인데, 이 앨범은 초기부터 꾸준히 카사하라 히로코의 곡을 써주던 작곡가 스즈키 히로유키(鈴木啓之)가 프로듀스한 앨범이다. 스즈키 히로유키는 이후에도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반을 2개 더 프로듀스한다.
이 앨범은 카사하라 히로코가 발매한 걸스 팝 계열의 마지막 앨범이다. 이 앨범 이후로 카사하라 히로코는 자기 개인 앨범에서는 다소 매니악한 스타일의 포크&프로그래시브 음악으로 전향하게 된다. 앨범 전체의 완성도는 ‘머나먼 여름의 휴일’보다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청아하고 미성숙한 히로코의 가성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앨범이기에 매우 소중한 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음악은 전형적인 아이돌 음악이었는데,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를 강조하는 곡들이 중심이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아직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악은 이거다’라는 자기 색체가 아직은 불분명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프로듀스 하는 아티스트에 따라서 앨범의 색채가 확연히 갈리던 시기였고, 애니메이션 주제가 베스트 음반 등이 너무 자주 발매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최고의 명반으로 꼽는 것이 1992년에 나온 ‘머나먼 여름의 휴일(遠い夏の休日)‘와 1994년에 나온 ‘안녕이 가져다 준 것은(さよならがくれたのは)‘이다.
‘머나먼 여름의 휴일’은 애니메이션 성우 음악의 대가였던 작곡가 이와사키 모토요시가 프로듀스했던 앨범이다. 그는 이 앨범 이외에도 크리스마스 캐롤송 앨범이었던 ‘캐롤링’도 프로듀스했다.
이 앨범은 단연 이 시기 히로코 앨범 중 최고 걸작으로 평가할만한데, 앨범 작업에 혼다 마사토(T스퀘어의 초기 섹소폰 연주자) 같은 사람이 참여했을 정도다. 곡, 보컬, 연주 등이 모두 훌륭한 앨범으로 평가할만한데, 특히 1번곡인 ‘하얀 페이지 속에(白いページの中に)‘와 2번곡인 ‘바닷바람에 T셔츠(潮風にTシャツ)‘와 7번 곡인 ‘Wind-바람속에(風の中に)~‘는 이 앨범에서도 꼽을만한 명곡들이다. 2, 7번 곡은 혼다 마사토의 섹소폰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 시절 또 하나의 명반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안녕이 가져다 준 것은’인데, 이 앨범은 초기부터 꾸준히 카사하라 히로코의 곡을 써주던 작곡가 스즈키 히로유키(鈴木啓之)가 프로듀스한 앨범이다. 스즈키 히로유키는 이후에도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반을 2개 더 프로듀스한다.
이 앨범은 카사하라 히로코가 발매한 걸스 팝 계열의 마지막 앨범이다. 이 앨범 이후로 카사하라 히로코는 자기 개인 앨범에서는 다소 매니악한 스타일의 포크&프로그래시브 음악으로 전향하게 된다. 앨범 전체의 완성도는 ‘머나먼 여름의 휴일’보다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청아하고 미성숙한 히로코의 가성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앨범이기에 매우 소중한 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2.2.2. 포크&프로그래시브 음악 시대: 1993~1999년 ✎ ⊖
카사하라 히로코는 1990년대 초반부터 곡을 써주던 여성 작곡자 ‘마츠미야 쿄코’와 편곡자인 ‘후지하라 이쿠로우’와 1993년 L’EXPRESS FANTAISIE라는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이전까지의 히로코의 음악 스타일과는 그 색채가 많이 달랐는데, 이전까지의 곡들은 히로코의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를 강조한 ‘예쁘지만 슬픈’ 곡들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L’EXPRESS FANTAISIE에서부터는 그녀의 목소리를 보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내는데 이용하게 된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매년 1장씩 발매되었던 마츠미야 쿄코와의 작업물은 모두 판타지적인 색채를 강조하고 카사하라 히로코의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로서 음악 속에 조화 시키는 곡들을 중심으로 한 앨범들이었다.
특히 이 앨범들은 전체적으로 히로코의 목소리와 톤이 높은 1종류의 악기(주로 어쿠스틱 기타 혹은 피아노)를 교차해가며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타일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츠미야 쿄코와는 이미 1989년에 Cafe Paradise라는 음반을 작업한 적이 있었는데(이 음반도 편곡은 후지하라 이쿠로우가 담당했다), Cafe Paradise가 전형적인 아이돌 음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L’EXPRESS FANTAISIE]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L’EXPRESS FANTAISIE에서는 카사하라 히로코도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아이돌풍의 창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판타지적 색채를 내는데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L’EXPRESS FANTAISIE은 다분히 미완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츠미야-히로코의 색채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의 2번째 앨범이었던 ‘MADRIGAL’ 부터이다.
1년에 거의 10장 가까운 CD를 내던 카사하라 히로코는 1993년부터 CD 발매수가 크게 줄어드는데, ‘안녕이 가져다 준 것은’ 이후 1년 반 만에 나온 앨범이 ‘MADRIGAL’이었다. 이런 긴 텀은 이전까지의 히로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 만큼 이 앨범은 상당히 많은 준비를 거쳐서 나왔었는데, 그에 걸맞게 앨범의 완성도는 훌륭했다. L’EXPRESS FANTAISIE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몽롱한 분위기의 보컬이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었고, 컨셉만이 아닌 악곡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가진 작품으로서의 느낌을 가져가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또 다시 1년 반 만에 나온 ‘SAGA’에서는 두 사람이 추구하는 사운드가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보다 프로그래시브하면서 포크 음악의 색채가 짙게 느껴지는 자신들만의 분명한 색채를 지닌 음악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MADRIGAL’, ‘SAGA’와 이후에 나온 ‘Siesta’는 앨범의 높은 완성도와는 달리 히로코의 음악이 갖고 있던 대중적인 색채를 완전히 지워버리게 된다. 이러한 영향은 마츠미야 쿄코의 판타지 4부작을 작업하던 시기에 나왔던 ‘진정한 나(本当の私)‘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음악적으로는 분명한 자기 색채를 가지면서 완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POP한 보컬의 카사하라 히로코라는 가수는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츠미야 쿄코와 함께 작업하던 시기에는 아라키 마키히코, 다나카 코헤이, 키시무라 마사미, 이와사키 타쿠 등과도 작업을 했는데, 쟁쟁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했던 만큼 작곡, 편곡, 마스터링 모두가 뛰어났던 시기다. 그야말로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악적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존의 걸즈 팝에서 장르를 바꿔 프로그래시브 사운드를 추구하게 되면서 L’EXPRESS FANTAISIE, MADRIGAL, SAGA, SIESTA와 이 4개 앨범 곡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라이브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TAKE THE “K” TRAIN AKASAKA BLITZ LIVE 등을 발표했던 히로코는 1998년에 마츠미야 쿄코와 마지막 작업물인 ‘Nostalsia’를 발표한다.
이 Nostalsia는 마츠미야-히로코 콤비의 최고 걸작이랄 수 있는 앨범이다. 이 앨범은 여성의 일생을 하나의 주제로 앨범 전체에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연주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는 점 등에서 프로그래시브 색채가 매우 강한 음반이고, 그럼에도 곡들은 전체적으로 어쿠스틱한 느낌을 강조한 포크 음악 중심인 독특한 색체를 지닌 앨범이다.
무엇보다 Nostalsia는 매니악해지던 둘의 음악을 90년대 초반의 POP한 음악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났던 앨범으로, 대중적인 색채를 지닌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완성된 카사하라 히로코의 몽롱한 보컬에 청아한 그녀 본래의 톤, 그리고 고음에서 섹시하게 간드러지는 느낌, 그 모든 히로코의 보컬이 하나의 앨범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앨범이다. [Nostalsia]는 곡의 완성도나 음반 전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마스터링도 매우 훌륭한 음반이다. 1번 곡인 Nostalsia와 2번째 곡인 ‘필요한 서류에는 사랑을(必要な書類は愛を)‘은 마츠미야-히로코 음반 중에서 가장 마스터링이 잘 되어 있는 곡들인데, 오디오 테스트에 써도 될 만큼 녹음이 잘 되어 있는 곡이니 제대로 된 시스템에서 한번 들어볼 만하다.
Nostalsia 이후에도 로미오의 푸른하늘에서 같이 작업했던 작곡가 이와사키 타쿠 프로듀싱으로 ‘aria’라는 음반을 발표한다. 이와사키 타쿠는 지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사운드트랙의 대가로 성장했지만, 이때만 해도 아직 무명 작곡가였던 시절이었다. 이와사키 타쿠는 aria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성우 카와스미 아야코의 음반도 1장 프로듀싱한 적이 있다.
aria는 이전까지 유지해오던 마츠미야-히로코 콤비의 색채를 최대한 벤치마킹해서 만들어진 음반인데, 곡들이 너무 다 똑같고 액센트가 없다고 할까?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좋지도 않은 평이한 앨범이었다. aria를 끝으로 카사하라 히로코는 또 한 번 음악적 성향을 바꾸게 되는데, 2000년대 이후 NEO DECADENCE부터 시작된 인디 색채가 강한 라이브 클럽 풍의 음악이다.
특히 이 앨범들은 전체적으로 히로코의 목소리와 톤이 높은 1종류의 악기(주로 어쿠스틱 기타 혹은 피아노)를 교차해가며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스타일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츠미야 쿄코와는 이미 1989년에 Cafe Paradise라는 음반을 작업한 적이 있었는데(이 음반도 편곡은 후지하라 이쿠로우가 담당했다), Cafe Paradise가 전형적인 아이돌 음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L’EXPRESS FANTAISIE]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L’EXPRESS FANTAISIE에서는 카사하라 히로코도 그때까지 유지해오던 아이돌풍의 창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판타지적 색채를 내는데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L’EXPRESS FANTAISIE은 다분히 미완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츠미야-히로코의 색채가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의 2번째 앨범이었던 ‘MADRIGAL’ 부터이다.
1년에 거의 10장 가까운 CD를 내던 카사하라 히로코는 1993년부터 CD 발매수가 크게 줄어드는데, ‘안녕이 가져다 준 것은’ 이후 1년 반 만에 나온 앨범이 ‘MADRIGAL’이었다. 이런 긴 텀은 이전까지의 히로코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 만큼 이 앨범은 상당히 많은 준비를 거쳐서 나왔었는데, 그에 걸맞게 앨범의 완성도는 훌륭했다. L’EXPRESS FANTAISIE에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몽롱한 분위기의 보컬이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었고, 컨셉만이 아닌 악곡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가진 작품으로서의 느낌을 가져가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또 다시 1년 반 만에 나온 ‘SAGA’에서는 두 사람이 추구하는 사운드가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보다 프로그래시브하면서 포크 음악의 색채가 짙게 느껴지는 자신들만의 분명한 색채를 지닌 음악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MADRIGAL’, ‘SAGA’와 이후에 나온 ‘Siesta’는 앨범의 높은 완성도와는 달리 히로코의 음악이 갖고 있던 대중적인 색채를 완전히 지워버리게 된다. 이러한 영향은 마츠미야 쿄코의 판타지 4부작을 작업하던 시기에 나왔던 ‘진정한 나(本当の私)‘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음악적으로는 분명한 자기 색채를 가지면서 완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POP한 보컬의 카사하라 히로코라는 가수는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츠미야 쿄코와 함께 작업하던 시기에는 아라키 마키히코, 다나카 코헤이, 키시무라 마사미, 이와사키 타쿠 등과도 작업을 했는데, 쟁쟁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했던 만큼 작곡, 편곡, 마스터링 모두가 뛰어났던 시기다. 그야말로 카사하라 히로코의 음악적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존의 걸즈 팝에서 장르를 바꿔 프로그래시브 사운드를 추구하게 되면서 L’EXPRESS FANTAISIE, MADRIGAL, SAGA, SIESTA와 이 4개 앨범 곡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라이브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TAKE THE “K” TRAIN AKASAKA BLITZ LIVE 등을 발표했던 히로코는 1998년에 마츠미야 쿄코와 마지막 작업물인 ‘Nostalsia’를 발표한다.
이 Nostalsia는 마츠미야-히로코 콤비의 최고 걸작이랄 수 있는 앨범이다. 이 앨범은 여성의 일생을 하나의 주제로 앨범 전체에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연주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는 점 등에서 프로그래시브 색채가 매우 강한 음반이고, 그럼에도 곡들은 전체적으로 어쿠스틱한 느낌을 강조한 포크 음악 중심인 독특한 색체를 지닌 앨범이다.
무엇보다 Nostalsia는 매니악해지던 둘의 음악을 90년대 초반의 POP한 음악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났던 앨범으로, 대중적인 색채를 지닌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완성된 카사하라 히로코의 몽롱한 보컬에 청아한 그녀 본래의 톤, 그리고 고음에서 섹시하게 간드러지는 느낌, 그 모든 히로코의 보컬이 하나의 앨범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앨범이다. [Nostalsia]는 곡의 완성도나 음반 전체의 완성도도 뛰어나지만 마스터링도 매우 훌륭한 음반이다. 1번 곡인 Nostalsia와 2번째 곡인 ‘필요한 서류에는 사랑을(必要な書類は愛を)‘은 마츠미야-히로코 음반 중에서 가장 마스터링이 잘 되어 있는 곡들인데, 오디오 테스트에 써도 될 만큼 녹음이 잘 되어 있는 곡이니 제대로 된 시스템에서 한번 들어볼 만하다.
Nostalsia 이후에도 로미오의 푸른하늘에서 같이 작업했던 작곡가 이와사키 타쿠 프로듀싱으로 ‘aria’라는 음반을 발표한다. 이와사키 타쿠는 지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사운드트랙의 대가로 성장했지만, 이때만 해도 아직 무명 작곡가였던 시절이었다. 이와사키 타쿠는 aria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성우 카와스미 아야코의 음반도 1장 프로듀싱한 적이 있다.
aria는 이전까지 유지해오던 마츠미야-히로코 콤비의 색채를 최대한 벤치마킹해서 만들어진 음반인데, 곡들이 너무 다 똑같고 액센트가 없다고 할까?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좋지도 않은 평이한 앨범이었다. aria를 끝으로 카사하라 히로코는 또 한 번 음악적 성향을 바꾸게 되는데, 2000년대 이후 NEO DECADENCE부터 시작된 인디 색채가 강한 라이브 클럽 풍의 음악이다.
2.2.3. 벨라복스 레코드 시대: 2000~2003년 ✎ ⊖
카사하라 히로코는 2000년에 나온 hiroko kasahara super best Warner 30th Anniversary Box 이후로 더 이상 워너 재팬에서 음반을 내지 않게 된다. 1999년에 나온 aria는 소니뮤직에서 발매되었었기에 소니뮤직으로 이적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조금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2000년부터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라는 생소한 음반사로 옮겨서 음반을 내기 시작한다.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야마모토 마사유키, 후지하라 이쿠로우, 성우인 코자쿠라 에츠코, 타케우치 마나미, 카사하라 히로코 등의 음반을 내는 인디 음반 제작사였는데, 여러가지 상황으로 추측컨테 야마모토 마사유키가 만든 회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현재 이 회사는 사실상 영업중지 상태다)
카사하라 히로코는 데뷔 초기부터 야마모토 마사유키와 매우 깊은 친분을 갖고 있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수 데뷔가 야마모토 마사유키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야마모토는 히로코에게는 은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그런 친분 관계가 그녀를 벨라복스 레코드라는 생소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했던 듯 하다.
이 시기의 음악은 모던 록, 발라드, 포크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분명히 하나의 색채를 갖고 있었다. 이 시기의 앨범은 모두 키시무라 마사미가 프로듀싱한 것들이었는데, 장르는 이것 저것 섞여 있었어도 모두 좁은 장소에서의 ‘라이브’를 염두하고 만들어진 곡들이었다. 소규모의 관중이 모인 곳에서 성량이 다소 부족한 히로코의 보컬을 생동감 있게 전할 수 있는 음악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 스타일이 바뀌긴 했어도 이 시기도 분명히 프로듀서가 추구하는 방향은 카사하라 히로코라는 보컬이 지닌 매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발전적인 시기였다.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히로코는 모두 5장의 음반을 발표했는데, 3장의 오리지널 앨범과 1장의 베스트 앨범, 그리고 1장의 라이브 앨범이 있다. 5장의 앨범 중 단연 최고의 걸작은 라이브 앨범인 ‘COOL DECADENCE’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 시절의 히로코 음악이 추구하는 방향은 그다지 넓지 않은 장소에서의 생동감 있는 라이브였다. ‘COOL DECADENCE’는 시부야의 ‘클럽 크와트로’라는 라이브 클럽에서 열린 라이브 실황을 담은 앨범이다. 이 공연은 바로 전에 발매된 NEO DECADENCE의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보다 히로코의 살아 있는 보컬을 위해 모든 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히로코의 보컬도 ‘진정한 나’에서부터 보여주던 코맹맹이 목소리를 강조한 스타일로 일관하면서 라이브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고, 진행 멘트에서도 원숙미를 느낄 수 있다. COOL DECADENCE는 히로코의 전체 앨범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명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발표한 음반들은 그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고, 히로코의 보컬도 더 이상 청아함과 몽롱함과는 거리가 있는 톤으로 변해버려서 음악적으로 확연히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벨라복스 시절부터 음악적인 자기 색채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라는 곳은 야마모토 마사유키, 후지하라 이쿠로우, 성우인 코자쿠라 에츠코, 타케우치 마나미, 카사하라 히로코 등의 음반을 내는 인디 음반 제작사였는데, 여러가지 상황으로 추측컨테 야마모토 마사유키가 만든 회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현재 이 회사는 사실상 영업중지 상태다)
카사하라 히로코는 데뷔 초기부터 야마모토 마사유키와 매우 깊은 친분을 갖고 있었다. 사실상 그녀의 가수 데뷔가 야마모토 마사유키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야마모토는 히로코에게는 은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그런 친분 관계가 그녀를 벨라복스 레코드라는 생소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했던 듯 하다.
이 시기의 음악은 모던 록, 발라드, 포크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분명히 하나의 색채를 갖고 있었다. 이 시기의 앨범은 모두 키시무라 마사미가 프로듀싱한 것들이었는데, 장르는 이것 저것 섞여 있었어도 모두 좁은 장소에서의 ‘라이브’를 염두하고 만들어진 곡들이었다. 소규모의 관중이 모인 곳에서 성량이 다소 부족한 히로코의 보컬을 생동감 있게 전할 수 있는 음악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 스타일이 바뀌긴 했어도 이 시기도 분명히 프로듀서가 추구하는 방향은 카사하라 히로코라는 보컬이 지닌 매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발전적인 시기였다.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히로코는 모두 5장의 음반을 발표했는데, 3장의 오리지널 앨범과 1장의 베스트 앨범, 그리고 1장의 라이브 앨범이 있다. 5장의 앨범 중 단연 최고의 걸작은 라이브 앨범인 ‘COOL DECADENCE’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 시절의 히로코 음악이 추구하는 방향은 그다지 넓지 않은 장소에서의 생동감 있는 라이브였다. ‘COOL DECADENCE’는 시부야의 ‘클럽 크와트로’라는 라이브 클럽에서 열린 라이브 실황을 담은 앨범이다. 이 공연은 바로 전에 발매된 NEO DECADENCE의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보다 히로코의 살아 있는 보컬을 위해 모든 곡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히로코의 보컬도 ‘진정한 나’에서부터 보여주던 코맹맹이 목소리를 강조한 스타일로 일관하면서 라이브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고, 진행 멘트에서도 원숙미를 느낄 수 있다. COOL DECADENCE는 히로코의 전체 앨범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명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에 벨라복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발표한 음반들은 그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고, 히로코의 보컬도 더 이상 청아함과 몽롱함과는 거리가 있는 톤으로 변해버려서 음악적으로 확연히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벨라복스 시절부터 음악적인 자기 색채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2.2.4. Y.M.O 시대: 2003년~ ✎ ⊖
카사하라 히로코는 2003년에 거의 30년 동안 몸담았던 소속사 ‘그룹 코마도리’를 떠나서 새로운 기획사인 Love Live로 이적하게 된다. 이 기획사의 이름은 이후 Y.M.O로 변경했다가 다시 지금의 오기 프로 THE NEXT로 변경되었다. Y.M.O에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야마모토(Y) 마사유키(M) 오피스(O)'. 아마도 야마모토 마사유키의 기획사로 이적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히로코는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음반사를 전전하게 된다.
‘카피 라이트 뱅크’, ‘벨우드 레코드’, ‘사이트론 디스크’, ‘퍼플힐즈 레코드’, ‘프론티어 웍스’ 등 이름조차 생소한 곳들에서 음반을 냈는데, 음악적인 완성도도 이전까지의 음반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음반사마저 그다지 영업력이 없는 인디음반 레이블이었던 탓에 그다지 잘 팔리지도 않은 듯 하다. 2007년에 워너저팬 시절 음반들을 대부분 디지털 리마스터링판으로 냈다는 것은 그만큼 새 앨범이 안 팔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음악은 뭐라고 말하기 좀 힘든데, 앞서 말했듯이 거의 낚시 수준의 앨범들을 내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마츠미야 쿄코와의 재결합도 있었고, 과거의 음악성을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음반도 있었지만 이미 쇠퇴한 히로코는 더 이상의 과거의 자신이 보여주던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다.
카사하라 히로코 자신도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음반을 내지 않고 있고, 음악적 활동은 매년 2~3회씩 열리는 라이브가 음악 활동의 전부가 된 듯 하다. 이미 1990년대 중후반에 음악적인 완성을 보였던 가수인 만큼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대중적인 히트곡은 대부분 애니메이션 주제가들이지만 말이다.(1)
히로코는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음반사를 전전하게 된다.
‘카피 라이트 뱅크’, ‘벨우드 레코드’, ‘사이트론 디스크’, ‘퍼플힐즈 레코드’, ‘프론티어 웍스’ 등 이름조차 생소한 곳들에서 음반을 냈는데, 음악적인 완성도도 이전까지의 음반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음반사마저 그다지 영업력이 없는 인디음반 레이블이었던 탓에 그다지 잘 팔리지도 않은 듯 하다. 2007년에 워너저팬 시절 음반들을 대부분 디지털 리마스터링판으로 냈다는 것은 그만큼 새 앨범이 안 팔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음악은 뭐라고 말하기 좀 힘든데, 앞서 말했듯이 거의 낚시 수준의 앨범들을 내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마츠미야 쿄코와의 재결합도 있었고, 과거의 음악성을 재현하고자 노력했던 음반도 있었지만 이미 쇠퇴한 히로코는 더 이상의 과거의 자신이 보여주던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다.
카사하라 히로코 자신도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음반을 내지 않고 있고, 음악적 활동은 매년 2~3회씩 열리는 라이브가 음악 활동의 전부가 된 듯 하다. 이미 1990년대 중후반에 음악적인 완성을 보였던 가수인 만큼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대중적인 히트곡은 대부분 애니메이션 주제가들이지만 말이다.(1)
3. 참여 작품 ✎ ⊖
3.1. TV 애니 ✎ ⊖
연도 | 제목 | 참여역 |
1983 | 은하표류 바이팜 | 카츄아 피어슨 |
1988 | 날아라 호빵맨 | 코코 |
1990 | 뾰로롱 꼬마마녀 | 민트 |
1991 | 디어 브라더 | 미소노오 나나코 |
1992 | 꼬꼬리코 돌격대(칼리메로) | 로시타 |
1992 | 쿠킹 파파 | 마미야 치카 |
1993 | 3번지의 타마-우리 타마 모르세요? 1기 | 타마 |
1993 | 무책임함장 테일러 | 아젤린 |
1994 | 마법기사 레이어스 | 호오우지 후우 |
1994 | 3번지의 타마-우리 타마 모르세요? 2기 | 타마, 노라의 원 주인 |
1994 | DNA | 쿠리모토 아미 |
1995 | 스트리트파이터2 V | 린코 |
1995 | 폭렬헌터 | 산츄 |
1996 | 바람의 검심 | 막달라 사요 |
1997 | 흡혈희 미유 TV판 | 아리사와 미호 |
1997 | 소년탐정 김전일 | 마리아 프리드리히 |
1997 | 개골개골 마법사 | 린 왕녀 |
1997 | 버리지말아줘 데이지 | G2 |
1998 | 바이스 크로이츠 | 마도카 사쿠라 |
1998 | 은하표류 바이팜13 | 카츄아 피어슨 |
1998 | 소년탐정 김전일 | |
1999 | 세라핌 콜 | 쿠리모토 유키나 |
2000 | 빅쿠리맨2000 | 스타일리스트 |
2001 | 닥터 린에게 물어봐요 | 빛의 무녀 |
2002 | 진 여신전생 데빌 칠드런 라이트&다크 | 아미 |
2002 | 만월을 찾아서 | 코우야마 하즈키 |
2003 | 트윈 스피카 | 카모가와 쿄코 |
2003 | 야미와 모자와 책의 여행자 | 마리엘 |
2004 | 크라우-팬텀 메모리 | |
2004 | Get Ride!암드라이버 | 퍼프 샤이닝 |
2005 | 부탁해요 마이멜로디 | 유메노 스즈 |
2005 | 충사 | 마호 엄마 |
2006 | 쯔바사 크로니클 | 아마테라스 |
2006 | 부탁해요 마이멜로디-빙글빙글 셔플 | 유메노 스즈 |
2006 |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GX | 프린세스 로즈 |
2007 | 세인트 옥토버 | 엄마 |
2007 | 마스터 오브 에픽-애니메이션 에이지 | 여자 뉴터 |
2007 | 상냥함과 감동의 메아리 | 어머니 및 단역 |
2007 | 엽기인걸 스나코 | 스나코의 어머니 |
2008 | 뱀파이어의 기사-길티 | 시키센리 엄마 |
2008 | 햣코 | 카게야마 오니유리 |
2009 | 쿠킹 아이돌 아이 마이 마인 | 아마노 세이카 |
3.2. OVA ✎ ⊖
연도 | 제목 | 참여역 |
1989 | 어셈블 인서트 | 미나미카제 마론 |
1995-04-21 | 아미테이지 더 서드 | 아미테이지 |
1987-01-14 | 엘프 세븐틴 | 루우 |
1991 | 궁극초인 아-루 | 산고 |
1988 | 최종교사 | 시라토리 히나코 |
1994 | 탄생 | 후지무라 사오리 |
1992-06 | 초시공요새 마크로스2 | 이슈탈 |
1985-04-05 | 초수기신 단쿠가 | 로라 설리번 |
1992-11-21 | 초막말 소년세기 타카마루 | 어린 텐구 지로 |
1991-07-25 | 데토네이터 오간 | 쿠미, 제퍼슨, 미쿠 |
1996-02-21 | 특무전대 샤인즈맨 | 카사하라 히토미 |
1987 | 버블검 크라이시스 | 신시아 |
1992 | 핸섬한 그녀 | 키무라 아야코 |
1994-03-21 | 파이널 판타지 OVA | 여왕 레나 |
1997-10 | 베이비 러브 | 아리스가와 세아라 |
1997-07-25 | 마법기사 레이어스 OVA | 호오우지 후우 |
1989-09-28 | 메가존23 Part3 | 료 |
3.3. 극장판 ✎ ⊖
연도 | 제목 | 참여역 |
1989-07-15 | NEMO/니모 | 공주 |
1993-08-14 | 3번지의 타마-부탁해 모모를 찾아줘 | 타마 |
3.4. 게임 ✎ ⊖
연도 | 제목 | 참여역 | 기타 |
아포나시 걸즈 올림포스 | |||
바이러스 | 멜로디 | ||
윙커맨더3 | 스피릿 중사 | ||
에베루쥬 스페셜 | 펠텐 마테우세스 | ||
에버17 | 아카네가사키 소라 | 엔딩곡 ‘Aqua Stripe’부름 | |
1998-10-01 | 에피쿠스 | 이오로이 나쯔키 | |
1994-01-28 | 에메랄드 드래곤 | 탐린 | |
킹스 퀘스트7 | 로젤라 | ||
1998-03-26 | 소년탐정 김전일2 | 유모리 마키 | |
2002-08-08 | 그로우랜서2 | 아리에타 류이스 | |
1997-12-11 | 환세허구 정령기도탄 | 넬 | |
2003-06-26 | CAT-사이버 어택 팀 | 카와이 우라라 | |
2006-06-28 | 쉐도우 하츠 | 쿠델카 이야상트 | 엔딩곡 ‘Shadow hearts’ 부름 |
2004-03-26 | 심포닉 레인 | 포니 | |
1998-03-12 | 계속 함께 | 이시즈카 미키 | |
1998-06-25 | 정령소환 | 뮤 | |
1996-11-12 | 전국 블레이드 | 유니스 | |
1998-05-28 | 쌍계의 | 나미히메 | |
1994-09-25 | 탄생 | 후지무라 사오리 | |
2005-02-24 | 달을 가르고-탐정 사가라 쿄이치로 | ||
1998-09-10 | 데뷰21 | 후지무라 사오리 | |
1997-01-14 | 천외마경 제4의 묵시록 | 유노 | |
1997-11-20 | 넥스트킹 | 펜넬 나스터티움 | |
1998-02-26 | 버닝레인저 | 크리스 패튼 | |
2009-04-09 | 햣코 해결사 사건부 | ||
1998-01-29 | 포토제닉 | 호죠 아야노 | |
1993-06-15 | 프리넷스 메이커2 | 딸 | |
1997-10-02 | 보이스 판타지아 | 프렛 | |
1995-08-25 | 마법기사 레이어스 | 호오우지 후우 | |
2009-10-01 | 마크로스 얼티밋 프론티어 | 이슈탈 | |
1994-03-30 | 몬스터 메이커 | 루피아 | |
1999-12-22 | 유구환상곡3 | 멜티 나브 | |
1996-10-18 | 랑그릿사3 | 루나 | |
2001-07-12 | 루나윙 | 실파나 |
(1) 그녀가 부른 애니메이션 주제가는 평범한 일본인들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