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卜鉅一, 1946년 3월 20일~
한국의 소설가 겸 시인 겸 시사평론가. 출세작 『비명을 찾아서』로 한국 문단의 열광적 지지와 함께 데뷔하였다. 이후로도 소설 창작을 꾸준히 해왔으나 그만큼의 평가를 받은 작품은 없다. 다만 장르문학에 여전한 관심을 보여, 창작 SF/판타지 소설에 대한 평론을 쓰거나 각종 장르문학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곤 했다. 최근에는 정치 논객으로서 더 알려졌다. 서울대 상경대 출신 답게, 하이에크나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관점에서 쓴 평론이 대부분이다.
목차
1. 생애
2. 탈민족주의론
2.1. 과학소설론
2.2. 영어공용어론
2.2.1. 해방 이후 세대, 탈민족주의자로서의 복거일
2.2.2. 세계주의적 국제어론
2.2.3. 유토피아적 영어 공영어론 – 병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기
3. 자료
4. 저서
4.1. 문학
4.1.1. 소설
4.1.2. 시집
4.1.3. 기타
4.2. 비문학
5. 영상
1. 생애
2. 탈민족주의론
2.1. 과학소설론
2.2. 영어공용어론
2.2.1. 해방 이후 세대, 탈민족주의자로서의 복거일
2.2.2. 세계주의적 국제어론
2.2.3. 유토피아적 영어 공영어론 – 병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기
3. 자료
4. 저서
4.1. 문학
4.1.1. 소설
4.1.2. 시집
4.1.3. 기타
4.2. 비문학
5. 영상
1. 생애 ✎ ⊖
충청남도 아산 출생. 이후 파주 근방의 미군기지촌에서 자랐다. 아버지 복영기와 어머니 유종현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지촌에서 자라며 영어를 익혔고,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온 원서들을 읽다가 SF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지촌에서 자란 경험은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의 밑거름이 된다.
온양 온천국민학교, 아산중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를 나온 후 1963년 서울대학교 상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중소기업은행에 입행했으며 포병 소위로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한다. 복직한 이듬해 중소기업은행에서 퇴직하여 한국알루미늄공업㈜, 풍성실업㈜, 한국기계연구소에 입소한다. 1982년 결혼했다.
84년도에 사표를 내고, 87년에 『비명을 찾아서』를 출간함으로써 데뷔한다. 등단 혹은 신문 연재를 거친 작가만이 출판을 할 수 있었던 당시 풍토에 비춰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문학과지성사의 김현이 그를 적극 추천했었다고 한다. 이후 시인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게재하여 시인으로서 등단한다.
온양 온천국민학교, 아산중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를 나온 후 1963년 서울대학교 상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중소기업은행에 입행했으며 포병 소위로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한다. 복직한 이듬해 중소기업은행에서 퇴직하여 한국알루미늄공업㈜, 풍성실업㈜, 한국기계연구소에 입소한다. 1982년 결혼했다.
84년도에 사표를 내고, 87년에 『비명을 찾아서』를 출간함으로써 데뷔한다. 등단 혹은 신문 연재를 거친 작가만이 출판을 할 수 있었던 당시 풍토에 비춰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문학과지성사의 김현이 그를 적극 추천했었다고 한다. 이후 시인 김춘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게재하여 시인으로서 등단한다.
2. 탈민족주의론 ✎ ⊖
2.1. 과학소설론 ✎ ⊖
등단하지도 않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문단 권력의 한 축인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출간된 사실은 한국 문단의 등단 구조를 파격적으로 뛰어넘은 사례로서 회자된다. 복거일 스스로는 "답안지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는데 글이 뛰어나다고 해서 장원으로 뽑아 준 당나라 시대의 시험관" 같은 일이라고 평했다. 복거일의 출간에는 당시 문지를 주도하던 김현의 영향이 컸다. 문학에서 전위성을 특히 중시했던 김현에게, 당시 문단으로서는 새로운 소설을 제시하는 듯 보이는 『비명을 찾아서』가 높은 평가를 받았던 듯 싶다. 이후로도 김현은 복거일과의 사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유고 일기인 『행복한 책읽기』에도 복거일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당시 SF 팬덤 밖에서는 대단히 참신한 장르였던 '대체 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문단 내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이문열이 『비명을 찾아서』의 구조를 모방한 대체 역사 소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를 내놓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로도 복거일은 뭇작가들의 선망어린 시선 속에 일간경제신문에 『역사 속의 나그네』를 연재하고, 1993년에는 한국 기성 작가 최초로 PC통신 연재를 하는 등(『파란 달 아래』) SF에 대한 한국 문단의 인식을 개선하는데 기여한다. 1990년대 초반 각 대학 국문과와 평단에서 SF라는 장르의 가능성에 대한 담론이 오갔던 데에는 복거일의 공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후 복거일은 듀나가 같은 출판사에서 『태평양 횡단 특급』을 내기 전까지, 문단에서 인정한 유일한 한국 SF 작가로 평가받았다.
SF, 복거일 자신은 거의 늘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고 불렀던 장르에 대한 복거일의 관심은 복거일이 평생 일관했던 주제와 관련된 듯 보인다. 복거일은 자신이 "민족주의"라고 규정지은 폐쇄적인 태도가 한국 사회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열린 태도를 지향함으로서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과거 그가 주창하여 사회적 논란을 낳았던 영어공용화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다. "민족주의의 핵심적 상징은 민족어"(1)인 상황에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것인데, 그의 주장 안에서는 SF또한 "영어"와 같은 위치에서 논의된다.
행복한책읽기에서 출간된 창작 SF 소설 앤솔러지 『누군가를 만났어』(2007)에 추천사를 주기도 했는데, 이 추천사를 통해서도 복거일이 SF 장르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추측 가능하다.
이 추천사에 따르면 복거일은 SF를 '현대 서양 문명의 본질적 특징'을 한국 사회에 이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듯 하다. 다만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복거일만의 주장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국 SF 팬들이 아서 클라크의 통신 인공 위성 이론 등 SF소설(혹은 그 작가들)이 과학/문명사에 기여한 예를 거론하는 것도 SF를 문학 그 자체가 아닌 문명 발달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복거일의 경우가 상당히 극단적이었을 뿐이다.
당시 SF 팬덤 밖에서는 대단히 참신한 장르였던 '대체 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문단 내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이문열이 『비명을 찾아서』의 구조를 모방한 대체 역사 소설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를 내놓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로도 복거일은 뭇작가들의 선망어린 시선 속에 일간경제신문에 『역사 속의 나그네』를 연재하고, 1993년에는 한국 기성 작가 최초로 PC통신 연재를 하는 등(『파란 달 아래』) SF에 대한 한국 문단의 인식을 개선하는데 기여한다. 1990년대 초반 각 대학 국문과와 평단에서 SF라는 장르의 가능성에 대한 담론이 오갔던 데에는 복거일의 공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후 복거일은 듀나가 같은 출판사에서 『태평양 횡단 특급』을 내기 전까지, 문단에서 인정한 유일한 한국 SF 작가로 평가받았다.
SF, 복거일 자신은 거의 늘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고 불렀던 장르에 대한 복거일의 관심은 복거일이 평생 일관했던 주제와 관련된 듯 보인다. 복거일은 자신이 "민족주의"라고 규정지은 폐쇄적인 태도가 한국 사회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태도를 버리고 열린 태도를 지향함으로서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과거 그가 주창하여 사회적 논란을 낳았던 영어공용화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다. "민족주의의 핵심적 상징은 민족어"(1)인 상황에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민족어를 버리고 영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것인데, 그의 주장 안에서는 SF또한 "영어"와 같은 위치에서 논의된다.
행복한책읽기에서 출간된 창작 SF 소설 앤솔러지 『누군가를 만났어』(2007)에 추천사를 주기도 했는데, 이 추천사를 통해서도 복거일이 SF 장르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추측 가능하다.
개항 뒤 우리 사회는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현대적 사회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예술 분야에서도 그러했다. 안타깝게도, 과학소설만은 우리 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과학소설이 현대 서양 문명의 본질적 특징이므로, 이런 사정은 더욱 안타깝다. 다행히, 근년에 젊은 작가들이 좋은 과학소설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 작품집을 만든 세 작가들은 대표적이다. 파란 싹들처럼 싱싱한 이 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2) |
이 추천사에 따르면 복거일은 SF를 '현대 서양 문명의 본질적 특징'을 한국 사회에 이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듯 하다. 다만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복거일만의 주장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국 SF 팬들이 아서 클라크의 통신 인공 위성 이론 등 SF소설(혹은 그 작가들)이 과학/문명사에 기여한 예를 거론하는 것도 SF를 문학 그 자체가 아닌 문명 발달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복거일의 경우가 상당히 극단적이었을 뿐이다.
2.2. 영어공용어론 ✎ ⊖
2.2.1. 해방 이후 세대, 탈민족주의자로서의 복거일 ✎ ⊖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과 관련하여 그의 개인사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가 해방 이후 세대였다는 점이다. 복거일은 해방 이후 태어나 - 이전 세대의 작가들과는 달리 – 일본어 상용이라는 ‘원죄(原罪)’로부터 자유로웠다. 즉 광복 이전 세대의 문인들에 비해 민족 담론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특징은 복거일이 민족주의적 친일 청산론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던 데서도 나타난다. 친일 행위가 청산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친일 행위로서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로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3) 비단 친일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복거일은 민족주의 자체를 일종의 폐쇄주의로 규정하며 한국 사회가 민족주의로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복거일에게 민족주의는 “특수주의particularism”의 속성을 띄며, “전체주의totalitarianism”과 쉽게 결합되는 제도로 이해된다.(4)
한편으로 복거일은 한국전쟁 이후에는 파주 인근의 기지촌에서 자라며 영어를 익혔고,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원서들을 읽으며 문학 수련을 했었다. 다시 말해 복거일은 일본어로부터 자유로웠던 대신에 영어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성장했다. 소설가로서의 복거일을 발굴했던 김현이 “복거일의 자신의 원천 중의 하나: 영어를 잘 한다는 것. 비명을 찾아서나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제일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영어책이나 영어 편지를 잘 읽고 쓸 때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5)
어쨌거나 복거일은 자신의 영어공용어론이 탈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진행되었음을 전제한다. 영어를 한국의 공용어로 삼음으로써 앞서 소개한, 전체주의로서의 민족주의를 한국 사회에서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족주의의 해체가 복거일류 영어공용어론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민족주의를 해체한 후 세계 시민으로서 다른 세계 시민들과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복거일의 입장에서 영어는 세계 시민들과의 교류 수단인 셈이다.
한편으로 복거일은 한국전쟁 이후에는 파주 인근의 기지촌에서 자라며 영어를 익혔고,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원서들을 읽으며 문학 수련을 했었다. 다시 말해 복거일은 일본어로부터 자유로웠던 대신에 영어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성장했다. 소설가로서의 복거일을 발굴했던 김현이 “복거일의 자신의 원천 중의 하나: 영어를 잘 한다는 것. 비명을 찾아서나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제일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영어책이나 영어 편지를 잘 읽고 쓸 때이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5)
어쨌거나 복거일은 자신의 영어공용어론이 탈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진행되었음을 전제한다. 영어를 한국의 공용어로 삼음으로써 앞서 소개한, 전체주의로서의 민족주의를 한국 사회에서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족주의의 해체가 복거일류 영어공용어론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민족주의를 해체한 후 세계 시민으로서 다른 세계 시민들과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복거일의 입장에서 영어는 세계 시민들과의 교류 수단인 셈이다.
2.2.2. 세계주의적 국제어론 ✎ ⊖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복거일이 영어를 ‘제국의 언어’가 아닌 ‘국제어’로 본다는 점이다. 즉 복거일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의 영어는 19세기 대영제국 시대의 영어와 다르다. 당시의 영어가 제국 내부, 혹은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소통을 위한 제국어(帝國語)였다면, 오늘날의 영어는 1세계 영어권 국가와 비영어권 국가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비영어권 국가간의 소통에도 사용되는 국제어(國際語)이다. 즉, 그가 보기에 영어가 가진 국제어로서의 힘은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서 나온다.(6) 예를 들자면 중국어는 제2언어로서의 지분을 갖지 못했기에 국제어로서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영어가 국제어로 된 것은 자연적 현상”이며, “영어는 조만간 국제어에서 발전하여 세계어로 자리 잡을 것이다.”(7)
복거일의 주장은 제1세계의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도입을 주문했다는 점에서, 메이지 초기 모리 아리노리에 의해 주장되었던 간이 영어론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히려 그보다는 모리의 서신 상대자였던 휘트니의 제안과 맞닿는다. 모리의 간이 영어론에 대해 휘트니는 차라리 완전한 영어를 수입하여 영어/일본어의 이중 언어 체제를 이루는 게 낫다고 했던 것이다.(8) 그러나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은 이중 언어 체제도 부정한다는 점에서 휘트니의 제안과도 다르다. 적어도 휘트니는 민족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민족어가 누리는 공용어의 위치를 국제어가 대신하게 해야 한다는 복거일의 주장은 진화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일종의 언어진화론에 기반을 둔다. 그에 따르면 국제어가 민족어를 대체하는 상황은 자연 도태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9) “영어가 모든 사회들에서 공용어로 쓰이게 되면, 언어의 장벽으로 보호된 조그맣고 비효율적인 문학 시장들은 하나의 커다란 범지구적 시장이 될 것”이며, 도태되는 민족어에 집착하는 자는 ‘박물관 언어’만을 가지리라는 것이다.(10)
사실 복거일의 주장에 일말의 합리성조차 없지는 않다. 폐쇄된 사회에서의 폐쇄된 언어로 담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는 그의 지론에서 발전된 영어 공용화론은 실상 근대 국민 국가의 소속원들을 국경 안으로 가두지 말고 국경 너머와 접촉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에 대해 민족주의적 분노로 대응하는 것은 그리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공격하는 대상이야말로 바로 그런 민족주의적 분노이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영어 도입을 통해 한국인이 잃을 것은 감정적 손실일 뿐이라고, 약간은 자신의 반대자들을 조롱하는 어조로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복거일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분노로 접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복거일의 주장은 제1세계의 영어권 국가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도입을 주문했다는 점에서, 메이지 초기 모리 아리노리에 의해 주장되었던 간이 영어론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히려 그보다는 모리의 서신 상대자였던 휘트니의 제안과 맞닿는다. 모리의 간이 영어론에 대해 휘트니는 차라리 완전한 영어를 수입하여 영어/일본어의 이중 언어 체제를 이루는 게 낫다고 했던 것이다.(8) 그러나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은 이중 언어 체제도 부정한다는 점에서 휘트니의 제안과도 다르다. 적어도 휘트니는 민족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민족어가 누리는 공용어의 위치를 국제어가 대신하게 해야 한다는 복거일의 주장은 진화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일종의 언어진화론에 기반을 둔다. 그에 따르면 국제어가 민족어를 대체하는 상황은 자연 도태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9) “영어가 모든 사회들에서 공용어로 쓰이게 되면, 언어의 장벽으로 보호된 조그맣고 비효율적인 문학 시장들은 하나의 커다란 범지구적 시장이 될 것”이며, 도태되는 민족어에 집착하는 자는 ‘박물관 언어’만을 가지리라는 것이다.(10)
사실 복거일의 주장에 일말의 합리성조차 없지는 않다. 폐쇄된 사회에서의 폐쇄된 언어로 담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는 그의 지론에서 발전된 영어 공용화론은 실상 근대 국민 국가의 소속원들을 국경 안으로 가두지 말고 국경 너머와 접촉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상에 대해 민족주의적 분노로 대응하는 것은 그리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공격하는 대상이야말로 바로 그런 민족주의적 분노이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영어 도입을 통해 한국인이 잃을 것은 감정적 손실일 뿐이라고, 약간은 자신의 반대자들을 조롱하는 어조로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복거일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분노로 접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2.2.3. 유토피아적 영어 공영어론 – 병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기 ✎ ⊖
첫째, 복거일의 이상이 실현 가능한가의 여부.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론에 대한 (일본인으로서는 들을만한 반론을 내놓은 거의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바바 타쓰이는 일본어를 영어로 교체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현실 인식 하에 반론을 지적했다. 즉 이미 기존에 자연스럽게 사용해오던 언어를 인위에 따라 타 언어로 교체하는 과정이 쉬울리 없으며, 그것이 결국 이중 언어 체제라는 문제적 상황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에도 이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긴 한다. 그러나 복거일은 이중 언어 체제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복거일은 “그러나 그런 이중 언어bilingual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며 “정작 우리 시민들이 크게 치러야 할 것은 감정적 비용이다.”라고 주장한다.(11) 이중 언어 체제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과도기일 뿐, 이내 영어 공용어 체제로 전환되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영어 격리English Divide’ 현상, 즉 가정의 재력에 따라 영어 습득 수준이 차이나는 현재 상황을 영어 공용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며, 자기 논지에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보인다.(12)
복거일이 이야기하는 영어 공용의 수단은 기껏해야 “① 법, 공공기관의 서식, 도로표지, 상점의 안내문, 식당의 식단과 같은 정보들의 국영문 병용. ② 국지적 공용을 위한 실험적 사업들의 추진(경제특구나 무역자유항에서의 영어 공용, 영어 전용 학습 시설, 영어 강의 등). ③ 유아교육과 초등교육에서의 영어 교육 심화. ④ 영어 방송의 확대.” 정도여서 영어공용어론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약해 보인다. 어떻게 본다면 자기 논지의 약점이 될만한 부분을 우회하고 있다고 할까.
기실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은 한국어가 조선어에서 영어로 완전히 교체된 뒤의 상황을 상정한다. 그러나 그 완전한 교체가 수월하게 이루어지리라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주장은 하나의 가설에 머물 뿐이다. 이러한 ‘가설’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어느 오래된 농담을 연상시킨다. 맨몸으로 무인도에 표류된 경제학자가 통조림을 발견하고서 말한다; “우리가 병따개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현재 병따개를 갖지 못한 경제학자에게 통조림을 딴 뒤의 장밋빛 미래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겠는가.
둘째,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전제하는 세계주의/국제어주의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가의 여부. 복거일의 세계주의/국제어주의는 폐쇄된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작다는 점, 그리고 국제어로서의 영어를 통해 제1세계는 물론 제3세계의 비영어권 국가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복거일의 주장이 그 자신의 주장대로 제국주의에 대한 의혹에서 자유로운지는 의심스럽다. 기실 복거일 자신부터가 ‘제3세계의 비영어권 국가’와의 소통에 썩 열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복거일이 사용하는 영어 자료들은 거의가 영미권에서 나왔으며, 타 언어에서 중역해온 자료까지 포함한다 해도 프랑스 등 제1세계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쇠멸한 만주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복거일은 “『케임브리지 도해 중국 역사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를 인용하고 만주어의 쇠멸을 『뉴욕 타임스』에서 보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복거일이 한국어로 쓴 에세이에 집요하리만큼 영어를 병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대목은 국제어로서의 영어를 이야기하는 복거일조차 실상 제국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에도 이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긴 한다. 그러나 복거일은 이중 언어 체제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복거일은 “그러나 그런 이중 언어bilingual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며 “정작 우리 시민들이 크게 치러야 할 것은 감정적 비용이다.”라고 주장한다.(11) 이중 언어 체제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과도기일 뿐, 이내 영어 공용어 체제로 전환되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영어 격리English Divide’ 현상, 즉 가정의 재력에 따라 영어 습득 수준이 차이나는 현재 상황을 영어 공용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며, 자기 논지에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보인다.(12)
복거일이 이야기하는 영어 공용의 수단은 기껏해야 “① 법, 공공기관의 서식, 도로표지, 상점의 안내문, 식당의 식단과 같은 정보들의 국영문 병용. ② 국지적 공용을 위한 실험적 사업들의 추진(경제특구나 무역자유항에서의 영어 공용, 영어 전용 학습 시설, 영어 강의 등). ③ 유아교육과 초등교육에서의 영어 교육 심화. ④ 영어 방송의 확대.” 정도여서 영어공용어론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약해 보인다. 어떻게 본다면 자기 논지의 약점이 될만한 부분을 우회하고 있다고 할까.
기실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은 한국어가 조선어에서 영어로 완전히 교체된 뒤의 상황을 상정한다. 그러나 그 완전한 교체가 수월하게 이루어지리라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주장은 하나의 가설에 머물 뿐이다. 이러한 ‘가설’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어느 오래된 농담을 연상시킨다. 맨몸으로 무인도에 표류된 경제학자가 통조림을 발견하고서 말한다; “우리가 병따개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현재 병따개를 갖지 못한 경제학자에게 통조림을 딴 뒤의 장밋빛 미래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겠는가.
둘째,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전제하는 세계주의/국제어주의가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가의 여부. 복거일의 세계주의/국제어주의는 폐쇄된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작다는 점, 그리고 국제어로서의 영어를 통해 제1세계는 물론 제3세계의 비영어권 국가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복거일의 주장이 그 자신의 주장대로 제국주의에 대한 의혹에서 자유로운지는 의심스럽다. 기실 복거일 자신부터가 ‘제3세계의 비영어권 국가’와의 소통에 썩 열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복거일이 사용하는 영어 자료들은 거의가 영미권에서 나왔으며, 타 언어에서 중역해온 자료까지 포함한다 해도 프랑스 등 제1세계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쇠멸한 만주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복거일은 “『케임브리지 도해 중국 역사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를 인용하고 만주어의 쇠멸을 『뉴욕 타임스』에서 보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복거일이 한국어로 쓴 에세이에 집요하리만큼 영어를 병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대목은 국제어로서의 영어를 이야기하는 복거일조차 실상 제국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3. 자료 ✎ ⊖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 실린 복거일에 대한 언급. 복거일 소설의 이해에 도움이 되겠기에 소개한다. 원래 본문 중간에 삽입되어 있었으나 글을 지나치게 어지럽히는 듯 싶어 뒤로 뺀다.
1987년 1월 6일 | 4시경에 복거일씨가 들렀다. 언제 봐도 깔끔한 차림인데, 수줍어 하기는 계집애보다 더하다. 그가 하는 말로는, 대전상고를 나왔다고 하는데, 집안에서나 학교에서나 신동으로 꼽혔다고 한다. 하기야 대전상고를 나와 서울상대에 들어갔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그의 이야기 중에서 들을 만한 것 또 하나: 가난한 사람들은 눈에 금방 띄는 환부(患部)이지만, 진짜 아픈 부분은 몸의 다른 곳이다. 그곳을 보지 못하는 한 총체성은 얻어지지 않는다. 사회라는 거대한 몸 속의 가장 아픈 부분은 정치와 돈이 만나는 자리이다. 그의 두 개의 계획: 어렸을 때 자란 파주 근방의 기지촌을 중심으로 한 중편 하나, 그리고 예비군 훈련에 관한 이야기 하나...."기지촌 이야기를 쓰려면 걸리는 것이 참 많아요. 우선 제 아버님만 해도 살아계시거든요...." |
1987년 4월 18일 |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문지, 1987)를 여러 날에 걸쳐 정독을 했다. 역시 그의 재능은 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문에 있다. 그의 시는 유럽적 의미에서의 묘사의 시다. 감정을 운문으로 표현한 것이 그의 시인데, 운문의 율격이 강하게 살아 있지 아니한 말이라 시의 울림이 덜하다. 그의 산문은 최인훈의 그것을 읽을 때처럼 단정하고 지적이고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서정적인 점도 최인훈과 닮았다. 그의 소설은 쥬네트가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른 텍스트의 곁다리를 제대로 읽어야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
1988년 4월 8일 | 복거일의 높은 땅 낮은 이야기(문지, 1988)의 장점은 역시 절제다. 내용도 형식도 단아하게 절제되어 있는 이 소설은 그런 만큼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60년대의 휴전선 묘사로는 한수준을 이루고 있다. 오생근의 해설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복거일의 자신의 원천 중의 하나: 영어를 잘 한다는 것. 비명을 찾아서나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제일 환희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영어책이나 영어 편지를 잘 읽고 쓸 때이다. |
1988년 5월 6일 | 복거일의 오장원의 가을에 대해서는 "감상적인 제스처와 다소 통속적인 지혜"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성민엽의 지적은 지나치게 날카로운 것 같지만, 넉넉하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
1988년 8월 2일 | 복거일의 "보수주의론"(문예중앙, 1988년 여름호)은 앎의 주체가 사회 변혁의 주체이며 이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씌어진 글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사회가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변혁의 방향을 틀 수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서운, 다시 말해 반-이성적인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의 보수주의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한도 내에서라는 의미의 보수주의이며, 사회 개혁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비순응적 보수주의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자유주의라고 알려져온 것과 같다. |
1989년 8월13일 | 복거일의 '임정'은 그 기도는 좋았지만 깊이는 없어 보였다. 그것이 텔레비전의 속성 때문인지 복거일의 준비 부족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다. 두드러진 것은 김구를 이승만보다 앞에 내세웠다는 정도겠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차라리 테러리즘의 옹호로 나갔더라면, 민족주의가 더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릴라를 다루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
4. 저서 ✎ ⊖
4.1. 문학 ✎ ⊖
4.1.1. 소설 ✎ ⊖
- 1987『비명을 찾아서』(94/03 재간)
- 1988『높은 땅 낮은 이야기』
- 1991『역사 속의 나그네』(1~3, 미완)
- 1992『파란 달 아래』
- 1994『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 2001『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 2002『목성잠언집』
- 2007『그라운드 제로』
- 2008『애틋함의 로마』
4.1.2. 시집 ✎ ⊖
- 1988『오장원의 가을』
- 2001『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4.1.3. 기타 ✎ ⊖
- 2002『세계환상소설사전』
4.2. 비문학 ✎ ⊖
- 1990『현실과 지향』(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 1994『진단과 처방』(한 자유주의자의 시각)
- 1996『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 1996『쓸모 없는 지식을 찾아서』
- 1997『소수를 위한 변명』
- 1998『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 1999『동화를 위한 계산』
- 2002『민중주의를 막아내는 길』
- 2003『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 2003『역사를 이끈 위대한 지혜들』
- 2003『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 2004『진화적 풍경』
- 2005『조심스러운 낙관』
- 2005『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 2007『이념의 힘』
- 2009『서정적 풍경』
- 2009『경제적 자유의 회복』
- 2009『자유주의의 시련』
5. 영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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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거일, 「아름다운 글을 찾아서」, 『수성의 옹호』, 문학과지성사, 2010, 34쪽.
(2)김보영/배명훈/박애진『누군가를 만났어』, 행복한책읽기, 2007, 뒷표지.
(3)복거일, 「친일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 『철학과 현실』Vol.53, 철학문화연구소, 2002, 150~151쪽.
(4)복거일, 「전체주의 사회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수성의 옹호』, 문학과지성사, 2010, 78~81면.
(5)김현, 「1988년 4월 8일」, 『행복한 책읽기/문학 단평 모음』, 문학과지성사, 1993.
(6)복거일, 「언어 시장의 자유화」, 『수성의 옹호』, 문학과지성사, 2010, 116면.
(7)복거일, 「문학의 진화와 확산」, 『수성의 옹호』, 문학과지성사, 2010, 103면.
(8)이연숙 저, 고영진․임경화 역, 「국어 이전의 일본어」, 『국어라는 사상: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 소명출판, 2006, 31면.
(9)복거일, 위의 글, 102면.
(10)복거일, 위의 글, 104~105면.
(11)복거일, 「언어 시장의 자유화」, 『수성의 옹호』, 문학과지성사, 2010, 142~143면.
(12)복거일, 위의 글, 147~1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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